고봉산은 해발 150여 미터의 비교적 낮은 산으로 개정면, 대야면, 성산면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지리적으로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 이름 붙여졌지만 야산이라 불러도 별 상관없을 정도다. 맑은 날 산에 오르면 사방팔방이 탁 틔어 원의 중심에 서 있는 모양새다.
고봉산은 나에게 꿈을 심어 준 아름다운 산이다. 봄에는 진달래꽃이 만발했고 가을에 오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게 군산항과 장항제련소였다. 장항제련소 굴뚝은 바람이 불면 조금씩 움직여야 넘어지지 않는다 했다. 굴뚝 연기가 길게 이어져 목포까지 간다고 알은체하며 어린 시절에 자주 찾던 산이다.
고봉산은 언뜻 보면 평범한 산이나 속내는 그렇지 않다. 그것도 자잘한 이야기가 아니라 국제적인 이해관계가 깊게 얽혀 있다는 점이 눈여겨볼 일이다.
고봉산에는 두 개의 커다란 동굴이 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일제가 대공포로 미군 비행기를 격추시키려고 파 놓은 굴이다. 기름진 옥구평야의 일등미 쌀 맛에 길들여진 그들이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 발악을 한 흔적이다.
굴 입구는 커다란 괴물이 아가리를 쩍 벌린 것 같다. 한여름 대낮에도 굴 속은 어두침침하고 찬바람이 싸하니 새어나 와 으스스하다. 작은 기침 소리에 굴 속에 숨어 있던 일본군 패잔병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다. 이렇듯 일제의 야욕에 찢겨진 고봉산의 생채기가 해방 75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자존심을 뭉개고 있으니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6.25의 비극도 고봉산을 비켜가지 못했다. 휴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땔감을 구하러 형들을 따라간 산골짜기에는 빨간 핏물이 흘렀고 소나무가지에는 찢긴 옷가지가 여기저기 걸쳐 있었다. 빨치산들이 죄 없는 양민을 데려다 무참히 학살했던 곳이다.
60년대에는 밥상머리에서 주로 미군부대 얘기였다. 어머니께서는 고봉산에 미군부대가 생겨 거기에 함부로 가면 큰일 난다고 조심하라 했다.
고봉산에 미군부대가 왜 생기는지 마을 사람들은 한마디의 소식도 듣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중장비를 투입해 산허리를 깎아 도로를 내고 헬리콥터가 요란을 떨며 물건을 싣고 날아다녔다.
요즘처럼 환경영향평가는 고사하고 어떤 반대나 항의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특히 우리집은 등잔밑이었는데 미군부대에서 들려오는 쉴 틈 없이 징징거리는 엔진 소리를 30여 년 동안 귀에 담고 살았다. 엔진 소리는 날이 흐리거나 궂을 때 더 커지는 바람에 마치 고봉산의 마음 아픈 속울음을 듣는 것 같았다.
이제 미군부대는 철수를 한 상태다. 어릴 적엔 그렇게도 높기만 하던 봉우리를 깎아 내려 산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다. 아직도 깎아내린 만큼의 높이로 미군이 설치한 물탱크가 의기양양 남아 있어 고봉산을 바라보는 마음을 더 씁쓸하게 한다.
고봉산을 제대로 앉혀 놓아야 한다. 고봉산은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국제적으로 관심이 컸고 상처도 컸다. 일제의 침략과 북한공산당의 만행과 미군부대가 장기간 주둔하며 남긴 산봉우리의 상처와 인근 주민들에게 입힌 생채기가 지금도 남아 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고봉산을 하루속히 원상복귀해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아울러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정비해 시민의 휴식공간과 산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것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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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미래신문 (kmrnews@hanmail.net)
